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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별 지명 유래

  • 제목 선너머(중화산동)
  • 작성자 전주시청
  • 등록일 2007-11-11

전주의 향교와 문묘(文廟)는 고려 우왕(禑王) 6년에 본시 부성내 남부인 지금의 경기전(慶基殿) 부근에 있었는데 조선조 태종(太宗) 10년에 경기전이 조영(造營)되자 인접하고 있는 향교에서 독강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성령(聖靈)을 안위케 하는데 어긋난다고 하여 전주부의 서쪽인 화산(華山) 기슭인 삼계리에 이전했다.
이 자리에서 약 2백여년간 있었는데 당시 전주천은 현 다가산(多佳山) 밑인 신흥학교 교정을 도는 소(沼)를 이루었으며, 장마철만 되면 선비들이 전주천을 건널 수 없었고 부성과 너무 떨어져 불편하였으며 좌묘우사(左廟右杞), 즉 객사에서 남면, 좌면에 문묘(文廟)를 세우고 우면에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하는 제도에 어긋난다고 하여 선조(宣祖) 36년 관찰사인 장만(張晩)이 품신하여 현 교동 자리에 이전했다.
또한 화산서원(華山書院)은 선조 때 향교 자리에 세웠으며 서원 옆에 희현당(希賢堂)을 두었는데 희현당은 오늘에 말하면 대학 정도의 수학을 했다.
그러나 한말 때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완용(李完用)이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인 이 곳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자 철거하고 또한 서원비(書院碑)를 현재의 중화산동(中華山洞) 2가 산13번지에 다시 세웠다.
희미하게 남은 서원비(書院碑)에는 당시의 화산서원과 희현당 그리고 황학대(黃鶴臺)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뜻있는 이의 눈길을 멈추어 주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화산을 넘어 서원이 있었다고 해서 화산서원 너머를 선너머로 부르고 있으며, 서원너머에서 나오는 미나리는 전주팔미로 이름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