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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별 지명 유래

동별 지명 유래
전주시 ‘전주’지명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용된 지명으로 보인다.『여지도서』(전주)에“백제 때는 완산(完山), 555년 (신라 진흥왕 16)에 완산주(完山州), 756년(신라 경덕왕 15)에 전주(全州), 후백제에는 견성(甄城), 936년(고려 태조 19)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940년에 전주, 1018 년(고려 현종 9)에 순의군(順義軍), 1392년(태조 원년)에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 1430년(태종 3)에 전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후 다른 지명으로 부르다가, 조선시대 이후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전주’지명은‘완전하고 온전한 고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전주군, 1914년 전주면 등으로 부르다가 1949년 전주시로 승격되었다.
완산구 ‘완산’지명은 백제시대에 전주를 나타내는 지명인 완산(完山)을 구의 명칭으로 사용함으로써 유래하였다. 이 지명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에“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인근의 완산칠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88년 완산출장소가 개설되었고 1989년 완산구로 되었다.
덕진구 지명은 1988년 출장소 개설 당시 이곳에서 가장 역사 성을 지닌 덕진동의 이름을 빌어 정하였다. 덕진(德津)은 큰 나루를 뜻하며,『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에는 덕진지(德津池)로 표기되어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만경강으로 통하는 조운의 구실을 하는 수로의 시발점이었다. 1989 년 출장소에서 덕진구로 승격되고 현재에 이른다.
노송동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정리·신동리·삼리 일부와 용전면의 기봉리와 부동면의 오계리·육계리를 병합하여 노송리가 되었다.‘노송리’지명은 이곳에 늙은 소나 무가 많아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1940년 전주부(시)에 편입되었고, 1946년에 전주시 노송동으로 개칭되었다.
서학동 동서학동 지명은 황학봉의 동쪽에 위치하고 서서학동은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유래되었다. 『완산지』에는 황학봉(黃鶴峰)을“전주부의 남 쪽 5리에 있는데,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며, 큰 내가 돌아 안고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황학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에는 이 산을‘황학대(黃鶴臺)’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황학이 놀던 곳을 서학(棲鶴)이라 칭하였고, 풍수지리상 산의 형 국이 학이 날개를 편 모습이라는 데서 학과 관련되어 이 름이 붙여졌다. 고덕산의 능선을 타고 내려온 매의 형상을 한 매 봉재, 학이 많은 동네라는 학봉리, 연탄의 원료인 무연탄 의 광산이 있던 검은 돌의 마을인 흑석골, 천주교의 순교 지인 초록바위, 공수내 등이 있다.
삼천동 지명은 하천 지명인‘삼천’에서 유래되었다. 삼천, 황소천, 맏내 등 3개의 하천이 합쳐져서 전주천으로 흘러 들어가기에 삼천(三川)이라 칭하였고, 여기서 지명이 연유하였다.
서신동 조선시대에는 전주군 이동면에 속했으며, 1914년 신포리·신정 리·쌍룡리 등을 병합하여 서신리(西新里)라 칭했다. 1940년 전주읍에 편입되면서 서신정으로, 다시 해방 후 인 1946년에 서신동으로 개칭하였다. 지명은 고삿들의 한자표기인 고사평(古沙坪)이나 새터의 서쪽에 생긴 마 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서신동에는 과거 농촌마을의 이름인 감나무골, 바구벌, 고사평 등의 지명이 아직 남 아 있다.
서신동 조선시대에는 전주군 이동면에 속했으며, 1914년 신포리·신정 리·쌍룡리 등을 병합하여 서신리(西新里)라 칭했다. 1940년 전주읍에 편입되면서 서신정으로, 다시 해방 후 인 1946년에 서신동으로 개칭하였다. 지명은 고삿들의 한자표기인 고사평(古沙坪)이나 새터의 서쪽에 생긴 마 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서신동에는 과거 농촌마을의 이름인 감나무골, 바구벌, 고사평 등의 지명이 아직 남 아 있다.
완산동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에는“완산 은 작은 산이다. 부의 남쪽 3리에 있고, 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으로”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 지명은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임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에 부남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1914년 부남면 의 곤지리·은송리 일부와 부서면의 오계리 일부를 합병 하여 완산정으로 칭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완산동으로 개칭하였다.
중앙동 지명 은 전주시 중심부의 서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도로인 중앙 로에서 유래되었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에는 대정정 거리[大町通]로 불리었다. 1895년에 전라감 영에 진위영(鎭衛營)을 설치하여 신식군대가 주둔한 곳이어서 진영터라고도 한다.
다가동 다가산( 多 佳 山 )에서 따온 이름이고, 약전골 혹은 약전동(藥廛洞)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1943년까지 약령시(藥令市)가 형성되어 약재를 파는 전포(廛鋪)가 들어선 곳에서 유래하였다.
중화산동 전주 도심의 외곽에 있는 화산에서 유래한 화산동과 중 산동을 합하여 중화산동이라 한것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호구총수』(전주)에는 부서면에 화산리(華山里)라는 기록이 있어 이 지명이 매우 오래된 것임을 보여 준다. 화산에는 화산서원이 있는데, 『 여지도서 』(전주)에는“관아 의 서쪽 5리에 있다. 만력 무인년(1578, 선조 11) 봄에 처 음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주군 부서면(府西面)에 속했으며, 1914년에는 이동면으로 편입되었다. 1940년에 전주부에 편입되어 화산정(華山町)으로 개칭되었고, 1946년에 남 화산동과 북화산동으로 분동되었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 을 거쳐 1973년에 중화산동이 되었다.
평화동 평화동의 평야는 난전뜰, 평뜸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평화 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957년에 완주군 우전면의 석불리·장천리·문정리가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각각 평화동 1·2·3가로 칭하였다. 1973년 에 이를 합하여 평화동으로 하였다
풍남동 지명은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豊南門, 보물 제308호)에서 유래하였다. 법정동인 경 원동은 경동과 화원동의‘경’과‘원’을 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전동(殿洞)은 1946년에 경기전(慶基殿)의‘전’자 를 따서 붙였고, 교동(校洞)은 전주향교가 있는 곳이어서 향교의‘교’자를 따서 칭하였다. 조선시대에 전주향교 일대는 부남면 교동리로 불렸으나 일제 강점기 청수정이라 하였다가 해방 후 다시 교동으로 바뀌었다.
효자동 동의 이름은 효자리에서 유래 하였다. 효자리(현 전주국립박물관 근처) 에는 1627년(인조 7)에 정려를 받은 효자 장개남(張凱男)을 기리는 효자문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에“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에‘돌을 세워 효자를 표하였는데, 성씨를 아니 새겼네. 어느 때 사람이며, 효행은 어떠하였는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장개남의 효행에 얽힌 이야기는 3~4가지 정도가 전해져 오고 있다. 새고기를 먹고자하는 어머니를 위해 하늘에 두 손바닥을 마주대고 빌었더니 기러기가 떨어졌다는 기러기배미이야기, 한겨울 수박을 구하러 헤매다 동네 뒷 산에서 수박을 구한 수박골 이야기. 머슴살이를 해서 얻은 밥을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세내(삼천)을 건너려고 했으나 물이 갑자기 불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께 맛있는 밥을 드리려는 일념에 물에 뛰어들었더니 물이 갈라져서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 내려온다.
금암동 지명은 구암산 아래의 팔달로 변에 있는 칼바 우, 즉 검암(劍岩)에서 연유하여 유래되었다. 이후‘칼 검 (劍)’자보다는‘쇠 금(金)’자가 좋다고 하여 금암동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부북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부북면 의 검암리(劍巖里) 등 12개 마을, 이동면의 2개 마을과 조촌면의 1개 마을을 합하여 검암리라 하면서 이동면에 편입시켰고 1957년에 금암동으로 개칭하였다
덕진동 덕진동은 덕진공원에 있는 덕진못에서 연유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조촌면에 속 해 있었으며 1940년에 전주시로 편입되었고 1946년에 덕진동으로 칭하였다.
여의동 동 지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동산리 일대에 조성한 동산농장( 東山農場)에서 연유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주군 조촌면(助村面)에 속했으며, 조촌면의 일부가 광복 이후 전주시 로 편입되었다. 1985년에는 조촌읍으로 승격된 후에, 다시 1987년에 동산동과 조촌동으로 분할되어 전주시로 편입되었다. 일제잔재 청산을 위하여 동명 개정을 추진하여 동산동에서 여의동으로 변경되었다.
만성동 이 마을이 어느 때인가는 만 명의 사람이 살 수 있게 번창 할 수 있는 마을이 될 것이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다.
고랑동 지형이 호랑이처럼 생겼기에 호랑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고랑으로 되었다고 한다.
장동 장씨가 많이 살았기에 장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송천동 시에 편입되기 전의 중심 마을인 오송리(五松里)와 시천리(詩川里)의 송 ( 松 )자와 천( 川 )를 따서 송천동이 되었다. 최근에는 이를 우리말로 해서‘솔내’라고도 부른다. 조선 영조 때의 영 의정인 김치인(金致仁, 1716~1790)은 송천동 일대를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 즉 만 명의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 수 있는 땅이라 하였다.
우아동 조선시대에 전주군 용진면·초곡면과 부곡면에 있었다. 1914년 용진면 아중리(牙中里)·석소리(石所里) 와 초곡면 우방리(牛方里)로 개칭되었다. 1957 년에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우방리(牛方里)와 아중리(牙中里)의‘우(牛)’자와‘아(牙)’자를 합하여 우아동(牛牙洞 )이라 칭하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때 아중리를 우 아동1가, 석소리를 우아동2가, 우방리를 우아동3가로 하 였으나 1973년에 우아동으로 통합하였다.
금상동 금상동의 금상(今上)이 ‘현재 왕의 위에 있는 임금’이란 뜻으로 이 마을에 있는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의 묘가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산정동 원산정 마을 뒷산에 정자나무가 있어 생긴 이름이다.
인후동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 합할 때 기린봉의 북쪽, 즉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 부동면과 부북면에 속했으나 1914년 부동 면의 표석리와 부북면의 비단리·사천리 등을 인후리( 麟後 里 )로 개칭하여 완주군 이동면에 편입했다. 1940년에 전주부에 인후정(麟後町)으로 편입된 후 1949년에 인후 동으로 개칭되었다.
조촌동 만경강의 배후습지 지역으로 번개뜰이라는 평 야가 발달하고 있다. 조촌천(助村川)이 흐르고 있다. 지명 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조촌면에서 유래되었다조선시대에 전주군 조촌면에 속했으며, 1935년에 완주 군으로 편제되었다. 1985년에 완주군 조촌읍으로 되었으 며, 1987년에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조촌동이 되었다.
반월동 해방전부터 반월동 남반월마을에는 대규모의 시장이 있었고, 이곳 상인들의 물가가 비싸다고 하여 쪽고래미라고 불렸다. 구름 가운데 떠있는 반달과 같다하여 붙여진 반월동이라 불렸다.
화전동 마을 앞 갯벌을 일구어 밭으로 만든데서 유래하였다.
성덕동 산 세 개의 봉우리 형상에 따라 불리던 삼덕리가 성덕리로 변형되었다.
용정동 뒷마을 산의 형세가 용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북동 지명은 조선시대 이 곳에 있었던 진북사(鎭北寺)에서 유래되었다.『여지도 서』(전주)에는“관아의 동북쪽 성 안에 진북정(鎭北亭)이 있다. (중략) 관아에서 북쪽으로 5리에 진북사(鎭北寺)가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진북사는 현재는 북고사(北高寺)라고도 불리운다. 조선시대 에는 전주군에 속했으며, 1930년에 소화정(昭和町)이라 칭하였다. 1945년에 진북동으로 개칭하였고,
팔복동 조선시대에 8명의 선비가 공부하여 과거시험에 급제한 터인 팔과정( 八 科亭)의‘팔(八)’과 가장 큰 마을인 신복리(新福里)의‘복 (福)’을 따서 팔복동(八福洞)이라 칭하면서 지명이 유래 되었다.
호성동 지명은 소양천이 이 지역을 성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호성동이라 칭하였다는 설, 소양천의 호수‘호(湖)’자와 큰 마을인 신성리(新城里)의‘성(城)’자 를 따서 호성동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평양성을 수복하는 데 공로를 세운 이주( 李 柱 , 1562~1594)가 호성군(湖城君) 작호와 함께 초포면 일대 를 사패지로 받은 데서 연유했다는 설도 있다. 『 여지도서 』(전주)에는 호성군 이주의 묘가“관아의 북 쪽 10리쯤 초곡면(草谷面) 건지산에 있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주군 회포면(回浦面)과 초곡면(草谷面)에 속해 있었다 . 1935년에는 두 면이 합해져서 각 이름의 한 자씩을 따서 완주군 초포면(草浦面)이 되었다. 1957년에 초포면이 전 주시에 편입되면서 호성동이 되었다.
혁신동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지역의 산·학·연·관이 서로 협력하여 최적의 혁신여건과 수준 높은 생활환경을 갖춘 새로운 차원의 미래형도시로 혁신동이라 하였다.
출처 : 한국지명유래집 전라/제주편 (2010)